어쩌면 알고는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은 재능

그거 알아? 게으른 거.

안지 얼추 삼십년은 다되어 가는, 후배가 꽤나 시간이 지난 후에 내게 내던진 말이 게으르다는 얘기다.
그 짧은 문장이, 꽤 오래전에 깨져버린 인연의 시초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그냥 내 자신의 문제겠거니 했는데, 그게 연애사에도 미친 영향이 적지는 않을 거다. 예전에는 그에게 집중을 못한 건 아니고, 그냥 내가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그런 게으름이였던건 같은데, 시간이 들어가면서 사는것 전반에 걸치고 말았다. 이십대 중후반에 미래를 예측한 건 아니겠지만, 게으른, 미련한 성실함이 가끔 보게되는 얼굴에 베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내가 익숙치 않고, 그냥 해 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줄 알았는데, 지금은 시간만 내가 조여가며 게으름을 즐긴다. 내일 할 오지랖은 오늘 들쳐내서 한없이 펼쳐 내지만, 오늘 할 일은 한 쪽 구석틈에 발가락 끝으로 밀어낸다. 막상 꺼내면 별 거 아닌 경우도 종종 있는데도, 무슨 스릴을 느끼려고 그러는지, 시계만 한없이 처다보면서 일을 미룬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건가? 그냥 앞에 보이는것에만 신경쓰고 말아.
단편적인 것에만 신경을 쓰려고만 한다. 그냥 익숙한 것에 매달리다 보니, 다른 것에는 신경을 아예 쓰지 않으려 한다. 어쩌만 지금 옷이 걸맞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냥 그래왔던 것처럼, 매번 지적질 당하는 것처럼, 현재에만 안주한다. 딱 거기까지의 그릇이겠거니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는 하는데, 그건 어느정도 생각이 있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처음에 난 어쩌다가 PM이 되고, 팀장이 되고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주어지니까 그렇게 된건긴 한데, 지금도 그런 것 중에 하나이고 과정이라고 보면 되는건 아닌지?

왜 그때는 그런말을 하지 않았을까? 딱 그때 한번은 해봤을 법은 얘긴데? 오십줄에, 더 이상 가리고 말 것까지도 없는 그런거라서 그런말을 툭 던졌을까? 나도 알고 있는 얘기긴 한데, 막상 그런 얘기를 따로 들었을때는 좀 충격이다 싶다. 아무리 그렇지 숨기고 싶었던 걸 까발려 내는게, 웬지 창피하기도 하고. 그런데…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그리 창피할게 있을까? 능력이 안된다 싶으면 도태되기 마련인데, 아직까지는 – 관심도가 떨어져서 그런게 맞긴 하다 – 그렇게까지는 보이지 않아서, 그 자리에 있는 있기는 해서, 자리만 잘 처신하면 – 그래봤자 얼마 가겠냐만 – 덜 창피한 수준에서 멈출 수도 있긴 하다. 그래도 한때는 묘한 감정에 있던 사람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는건 창피하긴 하다. 하나 둘 떨어져 나가다 보면 신비로운 게 –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 모습에서 나온, 내가 만든 망상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이 쓸데없을 정도로 상상해 버린, 찌질한 신비로운, 뭐 그런 게 – 없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한가지쯤은 남길 바랬는데, 이제 다 까발려져 버리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보다도 더, 창피해 진다.

그래도 쉽게 고치져지 않는, 게으름.
오늘도 역시 시간만 죽친다. 정확히는 일에 대해서만 게을러 진다.
바빠서 생각조차 못했다가도, 문뜩 자판을 두드리며 몇자라도 쓰는, 그런 – 누군가는 쓰잘데기 없어 보이는, 호사로운 취미라고 할 수도 있는 그런 – 일은 그래도 이번 주말에는 했다. 몇자는 아니지만 2000자 가까이(?! 그런 상상을 하고 쓴) 2편을 쓰려고 했고, 후다닥 넘겨 읽어 버리긴 했지만 며칠동안 짬내서 – 사실 주말에만 짬을 낸 – 소설 한권은 다 읽었고, 구석에 뒹굴고 있었던 기술서도 하나 다 읽어 간다.
일이라서 그런건가? 어쩌면 그것도 재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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